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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운동"에 대한 생각

kokunq 2022. 7. 22. 17:41

운동에 대한 생각

십 대 시절의 운동

내린 눈이 얼어붙은 운동장 한 켠에 덩그러니 골대만 있던 농구 코트에서 시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면서 공을 던지고 놀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 중요했던 것은 운동의 효과니 근육의 활성화니 하는 것들이 아니라 얼마 전에 본 슬램덩크에서 강백호가 왼손만 거들뿐 이라고 했기 때문에 나도 왼손이 거들 정도로만 사용되는 레이업 슛의 완성이 목표. 대전역에서 대한 통운 쪽으로 걸어가다 보행자 신호등을 기다린 적이 많았는데, 그때 보이던 어느 스포츠 용품점에 선가는 하루 종일 켜 놓은 브라운관 티브이에서 NBA 하이라이트 장면이 쉴 새 없이 나오곤 했다. 거기서 본 더블 클러치 하던 마이클 조던을 따라 하는 것이 운동을 하는 동기 그 자체이던 때. 그 시절 운동은 목표나 생각 없이 그냥 선망의 대상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이었음 뿐. 하루에 하루를 더해 연습하면 언젠가는 영상에서 보던 멋진 플레이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다가 중학교 때 박식한 체육 교사를 만나 ATP 니 젖산(Lactic Acid)이니 하는 개념들에 대해서 배우고 어렴풋이 신체의 운동 방식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된다. 그렇다고 운동을 대하는 자세나 운동에 기울이는 노력이 변한 것은 아니다. 알고 있는 것 따로 운동하는 것 따로. 젖산이 근육에 쌓이든 말든 내가 하고 싶은 날 하고 싶은 운동을 한다. 체계적? 그런 건 없고 다만 이기기 위한 운동만 있을 뿐. 이기면 기부니가 조쿠 지면 또 난 아직 멀었나 보다 하면서 지나가던 시간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축구나 농구를 하면서 내 신체는 적당한 부하를 소화하면서 지내온 듯.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십 대 시절의 그것은 운동이라기보다는 놀이에 가까웠다. 물론, 지금의 내가 운동이라는 행위에 대한 체계가 잡혀서 다양한 각도로 운동에 대한 정보를 쌓기도 하고 더 심도 깊게 알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겠다. 비추어 보면 그렇다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운동의 효과가 없었느냐? 그건 아닌데, 책벌레 스타일이나 히키코모리 같은 성향은 아니었지 싶다. 집에 내 전용 컴퓨터가 있었음에도 주말에 앉아 게임에 몰두하지 않고 일요일 아침 새벽같이 멤버들 모이는 인근 학교로 빠지지 않고 나가곤 했으니까.

이십 대 시절의 운동

스무 살이 되자마자 농구를 하다가 다친 경험이 있다. 후배 녀석과 부딪혀서 내 오른쪽 슬개골 골절. 하지만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통 깁스를 하고서도 농구장에 갔다. 앉아서 구경하거나 손으로 골대에 던지는 연습만 할 뿐이었지만. 그러다가 골절된 다리가 나아지자 나름의 방식으로 재활을 조금 한 후에 역시 농구장으로 가곤 했다. 스물두 살이던 해에 2002 월드컵이 있었다. 분위기는 축구로 옮겨갔고, 잘하지도 못하는 축구를 위해 축구화도 샀다. 역시나 운동의 이유는 친목과 이기기 위함. 작은 농구 코트에서 조직적인 플레이에 익숙하다가 드넓은 축구장에서 이리저리 뛰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손과 발의 상관관계를 알 수는 없지만, 왠지 나의 신체는 손으로 하는 운동은 어느 정도 하지만 발로 하는 운동은 잘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어떤 운동도 손과 발 둘 중 하나만 쓰는 운동은 없었기에 보완이 되었지만 여전히 발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부분은 과제로 남았다. 예를 들어 배드민턴을 치면 라켓 스매싱은 잘 되는데 신속한 스텝 변경은 잘 안된다. 하체를 자유롭게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인가? 어찌 되었든 이십 대의 운동 역시 운동에 대한 학습과 이해는 필요치 않은 운동이 대부분이었다. 신체 능력을 발전시키기보다는 내가 재미있어야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동기 부여가 되니까.

 

하지만 운동이 내 몸에 좋은 영향을 미치려면 어느 정도의 강도가 중요한지는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후배 녀석이 정기적인 운동으로 볼링을 하고 싶다고 말하길래 그런 건 운동이 되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있다. 땀을 흠뻑 흘리는 것은 기본이고 적어도 몇 분간은 심장이 너무 뛰어서 두 무릎을 짚고 헐떡거릴 정도가 되어야 운동이 된다고 믿었다. 일상생활에서 이왕이면 운동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자고 생각하곤 했는데, 자전거를 타게 되면 쉼 없는 페달링으로 허벅지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느껴져야 단순한 교통수단에 지나지 않고 나에게 득이 되는 운동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곤 했다. 김종국이 어느 예능 프로에 나와서 한 말이 생각난다. “고통은 신이 주신 선물이야” 그렇다. 고통이 수반되어야 운동의 효과가 있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삼십 대 시절의 운동

이십 대의 후반부에 내 인생에서 큰 변화를 겪는데, 살던 곳을 떠나 멀리 이사를 가게 된다. 농구장에 모이던 멤버들은 이제 없고, 축구 모임을 조직하면 잘 달려오던 동생들도 이제 두 시간 거리에 산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고 축구 모임에 더러 초대를 받았지만 삼십 대가 되면서 결심한 한 가지는 축구에 사용하는 시간을 좀 줄이자는 것이었다. 일단 발로 하는 운동이 잘 능숙해지지 않았고, 축구를 한 게임하고 나면 꼭 어딘가가 아프거나 부상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제 다른 운동을 찾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무턱대고 공을 향해 달리는 행위가 갑자기 나를 너무나 몰아붙여야 하는 것도 있었고, 몸싸움이 싫어서 이기도 했다. 축구는 이제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삼십 대에는 정기적인 운동의 필요성을 더 느낀 것 같다. 건강하시던 아버지의 뇌출혈과 가족력에 대한 두려움. 고지혈 증상이 있다는 검사 결과를 받아 들고는 건강을 유지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참 인터넷을 검색했던 기억이 있다. 살이 찌고, 생활 습관이 불규칙하게 되면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운동이 그런 것들을 상쇄하는 작용이 되어주길 바랐던 것도 있는 것 같다. 적어도 매주 배드민턴을 치려고 노력했다. 일요일 저녁에 배드민턴 코트에 가곤 했는데, 대회 일정으로 코트를 사용하지 못하는 날이면 몹시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배드민턴은 나에게 유산소 운동이자 심장 강화 운동의 범주에 들어갔다. 두 시간 코트에서 잘 치지도 못하면서 셔틀콕을 받아 내려고 뛰어다니다 보면 땀에 흠뻑 젖기 일쑤였고, 헉헉대느라 좀 쉬었으면 하고 느리게 셔틀콕을 줍던 때도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 남짓의 힘듦은 나에게 이 행위가 나의 좋은 건강으로 이어질 거라는 위안을 주었다.

 

삼십 대의 후반에는 실내 자전거 운동을 겸했는데, 이 역시 체계적인 운동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룹 라이딩을 할 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 번은 동호회 회원들과 라이딩을 나갔는데 나만 제일 뒤에 뒤쳐져서 따라가기 벅찼던 일이 있었다. 앞서가던 사람들이 이십 대의 팔팔한 체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오육십 대의 아주머니 아저씨들이었는데도 그랬다. 내 자전거가 비싼 고오급 자전거가 아니라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값비싼 자전거를 검색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까지도 신체의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이나 훈련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폭발적인 힘은 누구나 쓸 수 있다. 하지만 잘 분배하여 길게 사용하려면 페이스 조절에 대한 이해와 이해에 따른 훈련이 필요했다. 기록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100미터 달리기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마라톤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어쨌든 그 동호회 사건은 나에게 실내 자전거 운동을 통해 지구력을 향상하려는 목표를 주었다. 즈위프트를 결제하고 고정식 로라 위에 자전거를 올려서 일주일에 적어도 3번은 타기로 했다. 처음에는 30분 동안 타면 너무 힘들어서 내려오곤 했는데 너무 적은 시간 운동하는 것 같아서 45분 그리고 1시간으로 점차 늘려갔다.

사십 대의 운동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일어나 보니 사십 대의 1월 1일이 밝았다. 곧 COVID-19 가 터졌고 배드민턴을 칠 수 없게 되었다. 실내 자전거 운동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 되었다. 외출 자체를 못하던 기간 동안 실내 자전거 운동은 몸에 지속적으로 활력을 쏟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훈련이 쌓이고 1시간을 달려도 크게 힘들지 않게 되었을 즈음이 된 것은 실내 운동으로 자전거를 탄 지 약 1년 반 정도 되는 시점이었다. 단단해지는 허벅지 근육과 줄어드는 몸무게를 보면서 보람도 느꼈다. ‘이 정도면 적당히 운동하면서 잘 지내고 있어’ 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아니었다. 내 체력 수준과 운동 능력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준 계기는 “러닝”이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아내는 피트니스 센터에 다녔다. 사실, 코로나가 올 줄 모르고 1년 계약을 했었는데 몇 개월간 문 닫는 기간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1년을 다니게 되었다. 그 후가 문제였는데, 편두통을 앓고 있는 아내는 유산소 운동을 하면 증상이 완화된다는 것을 지난 1년간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이제 운동 습관을 유지하면서 생활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한 상황. 그래서 트레드 밀을 구입 했다. 덥거나 비가 오거나 미세먼지로 가득한 바깥이 아니라 실내에서 운동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유도 구입에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배송된 트레드 밀을 조립 하여 설치하고 올라가서 뛰게 된 첫날. 무언가 많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트레드 밀에는 문제가 없는데 내 신체가 문제였다. 고작 1km 남짓을 뛰고 더 이상 뛰는 게 힘든 거다. 그동안 운동은 끊이지 않고 해 왔지만 달리기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체력은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것. (물론 달리기를 하는 데에는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 후로 달리기를 잘하기 위해 공부도 많이 하고 지속적으로 노력을 해서 지금은 쉬지 않고 5km를 달리는 것이 가능하다.) 트레드 밀 설치 첫날 뛰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름 운동을 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5km 달리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또 한 가지 내 체력의 끝을 본 사건. 실내 자전거 운동을 실외로 옳겼더니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실내에서 자전거를 탈 때는 정해진 부하를 걸어놓고 꾸준히 페달링을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는 변화무쌍하다. 강을 건너기 위해 높은 육교를 올라야 하거나 애매한 속도의 오토바이를 만나면 따라가기 애매하여 추월하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내어 페달링을 하게 된다. 그뿐인가? 스트라바의 KOM을 차지하기 위해 몇몇 구간에서는 토 나올 정도로 온 힘을 다해 가속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신체 운동 능력과 최적의 효율을 내기 위한 방법에 관심이 생긴다. 선수들은 이 모든 과정을 어떻게 훈련할까? 어떻게 그런 높은 수준의 신체 능력을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을까? 결국 우리의 몸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선수들의 반만 따라간다는 목표를 잡으면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결국 이런 생각은 미친 듯이 검색을 하게 만들었고 심박수 영역에 대한 공부, 젖산 역치에 대한 공부 그리고 그 외 다양한 운동 관련 지식에 대한 공부를 하게 만든다. 그리고 공부는 체계적 훈련으로 이어지고 그러한 훈련은 기록의 단축으로 되돌아와 심리적 보상감을 준다. 그러다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기록이 단축되려면 죽을힘을 다해 달리던 것에 조금 더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것을 보태는 것이 아니더라. 페이스 조절 이 무엇인지 머리로 아는 것을 넘어 몸이 적응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페이스를 잘 조절하면 죽을힘을 다해 페달링을 하는 지경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의 기록을 낼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부는 운동을 조금 더 목표 지향적이 되게 해 준다. 이전에 운동이 의미하는 바가 체중을 감량 하기 위한 수단 혹은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어렴풋한 추상적인 효과에 대한 기대였다면 지금은 PMC 차트와 같은 보다 분별력 있는 데이터로 운동에 접근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 비교하게 된다.

 

그렇게 몇 달 자전거를 타다 보니 자연스레 신체에 변화가 찾아온다. 피부 아래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지방층이 조금씩 얇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몇 해 전 병원에서 채혈 도중 내 혈관 찾기를 어려워하던 간호사가 기억난다. 피하 지방이 많아지면 혈관이 숨어버리니까 내 혈관을 찾기 힘들어했던 것인데 나는 그 순간이 부끄러웠다. 다시 병원에 간다면 이제 조금 수월하게 찾게 될까?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몸무게 수치가 말해주는 기대치는 그럴 것이라 짐작하게 한다. 세수를 할 때도 차이를 느낀다. 얼굴을 문지르는 내 손에 느껴지는 감각은 얼굴 살이 빠져 좀 더 각진 얼굴을 만지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얼마 전까지 둥근 얼굴을 만졌기 때문에 느껴지는 차이라 생각한다. 턱 밑에 접히던 살도 많이 줄어서 턱을 아래로 내려도 크게 부담이 없다. 허벅지를 감싸던 피부가 얇아져서 근육의 굴곡이 만져질 때 기분이 좋다. 나이가 들면서 신체는 변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부정적인 방향이면 걱정이 되고 불만이 생기는데 긍정적인 방향이면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다.

 

다시 돌아와서 운동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운동은 이제 즐거운 스포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사십 대의 나이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만히 있는데도 점점 줄어드는 기초 대사량에 대처해야 하는 시기이다. 뿐만 아니라 노화되는 신체 기관에 자극을 주는 일에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의 운동처럼 승부에 집착하거나 어울려 노는 것에 대한 즐거움으로 유지되는 간헐적 습관이 아니다. 사십 대에게 운동이란 꾸준하게 하는 것, 나태해지고 싶은 인간 본성에 채찍질하면서도 유지해야 할 좋은 습관이다. 그렇다고 해서 운동이 처리해야 할 일처럼 느껴지고 꾸준히 하기가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땀 흘린 후의 상쾌함이나 매일 더해지는 활력을 느낄 때 운동할 수 있는 신체를 가지고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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